나의 소명서
나의 소명서
시골 어느 한적한 마을에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 만발하고 농부들이 일손이 바빠지는 곳, 여름이면 소를 몰고 산에 올라 이곳 저곳을 다니면 풀을 먹이면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보냈다.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놀이 이런 놀이를 하면서 꿈을 키웠다. 세상은 잘 몰랐지만 다행이도 아버지께서 신문을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고 육영수 여사 사건을 보시면서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제가 초등학교 3-4학년쯤이니까 지금부터 30년 전쯤 된 것 같다. 이런 생활은 하면서 교회 생활도 하게 되었다. 다행이도 저희 마을에는 일찍이 교회가 들어왔다. 할머니께서 어느 전도사 한 분을 모시고 세운 교회였는데, 저는 그 교회를 어릴 적부터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교회는 모든 문화의 산실이요.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이고 모이는 장소였다. 여름이면 성경학교를 한다고 도시 교회에 다니는 형들 누나들이 와서 율동을 가르쳐주고 노래도 가르쳐주었는데, 순진한 시골 아이들 눈에는 이들이 멋있게만 보였으며, 선망에 대상이었고 꿈에 대상이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저녁만 먹고 교회로 향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성탄준비에 바쁘게 보냈다. 성극이며 캐롤송이며 많은 것을 준비해서 성탄전야는 마을 사람들에 잔치였기에 모두들 모여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새벽 송 시간까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즐거운 시간들이었고 추억들이었다.
몇 살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모세의 십계명 영화를 필름을 통해 본 것이 기억이 난다.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볼려고 좁은 교회당 안에 모여들었다. 물론 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창문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후로 저는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어른들 부흥에도 참석하였다. 초등학생이 무엇을 알겠냐고 묻겠지만 저는 그 때 벌써 주님의 십자가상에 죽음을 알고 영접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른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 때 나에게 많을 알게 하였고 인생에 방향을 인도한 어느 여전도사가 계셨는데, 34살에 젊은 나이에 이런 시골에 오셔서 수고도 많이 하였다. 물론 결혼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까지도 혼자 살고 계시면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시절을 지나면서 신앙이 시들에 지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전 취업을 한 곳이 아파트건설현장에서 전기공사를 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은 학교 다닐때와는 너무나 판이했다. 낮에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저녁이 되면 술이면 담배면 세상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였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술은 마셨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생활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이런 생활은 접고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7월에 이라 너무나 덥고 힘이 들기도 해서 쉬는 시간에 동료들이 피우는 담배를 따라서 피운것이 나의 담배역사의 시작이었다. 주일이면 종교생활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어려서 다녔던 것이 생각나서인지 아니면 힘든 일들을 피해 볼려고인지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세례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열심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군 생활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 다시 교회를 멀리하고 술, 담배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골 여전도사와의 서신교환은 있었다. 계속해서 당부의 말씀이었고 충고의 말씀이었다. 저 역시도 한 쪽 구석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조금씩 일어났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 날, 이날도 여전히 술에 취해 기숙사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는데 오질 않았다. 일어나서 찬송가를 펼쳐서 부르기 시작했다. 한 곡 두 곡 부르는데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여전도사의 편지도 읽고 또 읽으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회사 생활은 하고 있는데 옆에 회사에 다니는 집사께서 우리 회사에 오게 되었는데 저랑 같이 교회에 가질 않겠냐고 물어왔다. 나는 쾌히 승낙을 했다. 안 그래도 교회를 찾고 있었는데 스스로 인도하시는 분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은 기도원이면서 교회와 같이 예배를 드리는 그런 곳이었다. 저는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회사를 마치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그곳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회사를 오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활이 1년 정도 계속되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나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신앙은 자라서 신학교를 가기로 결심을 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예 기도원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였다. 주위에 모든 사람들은 두 번째 놀라는 기색이었고 어떤 사람은 만류하는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의 신념은 확고했기 때문에 아무도 나의 길을 막지 못했다. 물론 형제들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부터(93년) 신학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은혜로만 생각하고 시작한 공부가 차츰 어려워지고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몇 번이고 포기할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주님이 나에게 준 일들이 있기에 지금까지 잘 견디어 왔다고 생각한다.